인도네시아에서 전합니다 99 (20230929)
아빠 까바르? (그간에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가는 보잘 것 없지만 너무도 영광스러운 섬김의 기회를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얻어 매일의 만나와 같은 시의절적한 은혜로 기적같이 살아가는 한 형제의 가정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케하시는 은혜와 평안을 전하며 안부의 인사를 올립니다.
오랜만의 선교편지인 관계로 조금은 길게 (평상시처럼요^^) 쓰여질 것으로 사려되오니, 마음에 준비를 미리하시고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삼하 24장에서는,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시고 심판하시려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받을 수 있는 세가지의 선택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삼 년의 기근이 생기는 것과 다윗이 자신의 대적에게 석 달을 쫓겨 다니게 되는 것과 삼 일간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는 것 중, 다윗은 그간의 자신이 겪었던 가장 쓰라린 경험을 피하고 싶은 생각이 우선한 나머지 “여호와께 직접 벌을 받겠다”는 세번째의 선택을 합니다. 그 결과 그날 아침을 시작으로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여 이스라엘 전역에서 7만명이나 죽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절감한 다윗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죄 지은 이는 바로 저입니다. 차라리 저와 제 집안을 벌하여 주십시오.”
과거의 힘겨운 경험이 이제는 싫다는 생각…이제는 안하고 싶다는 생각…
그 생각이 가져오는 선택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우선해야 한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망각하게 하더군요.
하나, 단기선교를 회고하며
무엇보다 먼저 단기선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올해에 다녀간 모교회의 단기선교팀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2006년 처음으로 단기선교팀을 꾸려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려 했을 때의 순수한 열정과 사역에 대한 열심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의 열기가 다시 기억이 났습니다. 출발 3 개월 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선교에 대하여 공부하고 사역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출발 1개월 전부터는 현지에서 하게 될 사역들의 동선과 역할 분담 등을 실재로 자리 배치하고 움직임과 시뮬레이션까지 해가며 준비하였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선교지에 도착해서는 어느새 팀원 전원은 정말 한 몸처럼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지나친 군대식 통제와 훈련에 (제가 신병교육대 조교 출신인지라) 불만이었던 ‘착하고 아름다운’ 한 청년은 (이름은 절대 노출 못합니다 ㄱ ㅅ 정도만 ㅋㅋㅋ) 소극적인 복수의 차원에서 몰래 몰래 보이지 않게 꾸준히 반기를 들기도 하였지요.
1. 지나친 열심
여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나친 준비도 부족한 준비만큼이나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먼저, 지나친 사역에 대한 집중은 현지의 교역자들과 현지의 분들에 대한 관심을 현저히 사라지게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의 미명 하에 현지분들과 인사와 교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어떻게 사역을 진행할 지에 대한 팀원들 간의 논의 만으로 정신이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말 송구하게도 모난 저를 만나 싫은 소리 (“그들 만의 리그를 하러 오신 겁니까?”)를 들으시고 속으로 감내하시다 포진이 난 입술로 현지 목사님들 현지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애쓰셨던 사역자 분도 기억이 납니다.
다음으로, 지나친 사역에 대한 집중은 현지에서 직접 수고하고 있는 선교사들에 대한 관심에는 눈과 귀를 닫게 합니다. 저희 모교회에서 오시는 팀의 예가 아닙니다. 그러나, 실재로 선교 현지에서는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방문한 팀의 인솔자가 철저히 선교사를 배제한 체 그저 선교사를 통역사의 수준으로만 관계하는 예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런 팀들은 오지 않으시는 게 낫습니다. 왜냐하면 동족인 선교사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라면 너무도 자명하게 이족인 현지 분들에게 상처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지분들은 그들의 사역의 내용을 보지 않습니다. 현지인들이 바라보는 것은 오는 팀의 태도와 표정과 손에 든 비싸 보이는 전자기기입니다.
2. 해외 수련회
단기선교여행은 고갈된 은혜를 채우는 해외 수련회가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먼저 주신 가슴 벅찬 사랑에 대하여 전심의 감사함으로 나아가고 사랑을 베풀고 주고 오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이 동의가 된다면, 어떤 이처럼 자신이 어린이 집회를 하여 현지아이들을 회심하게 하겠다는 호언장담을 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이 동의가 된다면, 어떤 이처럼 자신의 방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더 많은 성도를 동원하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이 동의가 된다면, 자신들은 Unreached People (미전도 종족)에게 나아가야 하므로 새로운 지역과 교회들을 개척하여 방문하게 하라 하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이 동의가 된다면, 현지에서의 사역 중 찍은 사진들에 자신들이 들어가 있는 사진만을 유용하고 가치 있는 사진으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둘, 장기선교를 회고하며
15년차에 들어가는 경력이면 장기선교를 운운할 자격이 되겠는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니 대답이 너무 자명합니다. ‘아니다’ 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정착을 시작하거나 삼 사년의 경력을 가진 선교사님들의 열정과 수고를 바라보면, 이미 오래전에 적응기을 끝내고 안정기에 들어온 여유로운 마음가짐은 말그대로 매너리즘의 옷을 입고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게으른 50대의 나이 많이 든 어른 아이인 제가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더 오래 했다고 더 많은 결실이 있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집니다.
1. “부질없다 그만해라”
일전에 정확히 13년 전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이필환 선교사님의 병원에서 만난 한 선배 선교사님의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권면이 기억납니다. “선교지에 왜 살려하느냐? 더 늦기 전에 젊을 때에 나가서 다른 일을 해라.” 이 전에야 속으로 대노하여 말도 안된다 치부하였던 말이었으나 이제는 왜 그런 얘기를 하셨을까에 대한 공감이 될 만한 환경과 시기와 자리에 있게 되다 보니 다는 동의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돌아보니, 외국인을 돈으로만 보는 현지에서의 대접이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저희 가정의 선교지 정착을 돕기로 하였으나 오히려 방해하였던 한때 동문이었던 현지인 목사님 마저도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사역이라고는 한국교회를 통하여 재정을 가져오는 것 뿐이다’라고 하였을 정도입니다. 초청하여 강단을 내어주고 설교를 부탁하는 제자들의 교회들에서 번번히 듣게 되는 재정에 대한 도움 요청은 차량이 망가져도 다녀오려는 저희의 진심을 뒤 흔들어 놓습니다. 자신의 교회의 행사를 기획하면서 예산안을 가지고 찾아와 재정적 도움을 주기를 강청하는 지역교회 목사들까지… 이 같은 경험은 매년 너무도 자주 겪는 일이지만 아직도 적응을 못 마쳤습니다.
항상 모아지는 선교헌금의 3분의 1을 매달 현지교회와 목회자에게 곧장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저희 가정의 필요보다 현지의 필요에 기꺼이 은행잔고를 사용하려는 마음은, 이 같이 그저 돈의 출처로만 여기는 이곳 사람들의 태도와 속내로 인해 깊이 배인 상처를 제 안에 남겼습니다. 이 감정의 상태라면 저도 다른 선교 헌신자를 말리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공감해달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같은 쓰라린 경험을 하기 싫어 타인에게 더 독해지고 더 엄해지고 더 원칙을 강조하고 싶어하려는 제 모습은, 앞서 언급한 다윗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는 상태였던 겁니다.
만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을 주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가지고 싶어하면 내어주고 달라하면 거저주어라’ 하신 주님의 명령이 들리지 않게 되는 순간, 모든 게 서운하고 모든 게 억울하고 모든 게 어이없고 모든 게 적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수년을 꾸준하게 해오던 제 사역을 가로채는 현지의 새로운 교역자의 일부터,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나눠준 자료들을 자신의 것으로 광고하고 사용하는 일까지, 이전에 해오던 15년의 선교사역의 헌신이 부정당하는 듯한 상황까지 발생하였고요.
하여 왜인지를 곰곰히 돌아보니, “이제는 이곳 선교지에 충분히 오래 있었으니 더이상의 힘겨운 일들은 하고 싶지 않다. 이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된다”하는 잠재적인 보상의 심리가 제 안을 이미 채워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2. “할만하다 더해보자”
초기정착의 시기에 있는 선교사들이 장담하며 내어 뱉었던 말들 – ‘자신의 자녀만큼은 반드시 현지의 학교에 보내겠다’고 하였던, ‘선배 선교사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겠다’ 하였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에서 현지인을 대하겠다’ 하였던, ‘현지인을 위해 선교사가 되었으니 한인들을 만나지 않겠다’ 하였던, 이런 이상적인 말들 - 을 들으며 예전에는 미숙함에서 나오는 호기로만 여겨 무시하였지만, 이제는 이들의 열의 찬 진심의 고백들이 주는 순수함과 진지함이 너무 값지게만 보입니다. 나아가, 이 초심이 왜 변질되거나 사라지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제 스스로를 돌아보며 고민하게 되고, 이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건설적인 고민까지 하게 되더군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단기선교여행팀의 선교와 지금 막 정착을 시작하는 선교사들의 선교는 장기 선교사들에게 엄청난 힘과 위로를 공급하여 줍니다, 초심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다시 저희 정착의 초기를 돌아보았습니다. 미국인 국제학교를 보내지 않기로 하여 보내게 된 학교에서 이사였던 이부 헬렌을 만나고 그 남편인 빡 헹끼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이 두 사람을 통해 소개된 브링인교회를 통하여 후견단체를 통한 비자를 해결하게 되었고, 후견단체의 파견의 형식으로 적법하게 압디엘 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고, 합법적인 비자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크리스타 미트라 중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 채플과 종교과목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제가 하고자 하여, 기회를 얻어내고자 하여 한 것이 없음을, 하여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리 고백을 하고 나니, 이 모든 관계들과 사역들을 하나님께서 걷어 가신다고 하여도 제가 화내고 서운할 일이 전혀 있을 수 없음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3.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얼마나 김정희 선교사를 통해 들은 교역자 구인광고가 있었습니다. 구인광고에 있는 복지혜택을 보면서 저희 둘은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차량과 사택과 교육비 등과 같은 구체적인 지원내역에 대한 것을 보며 한번도 그런 것을 기대해보지 않고 살아왔던 지난 삶이 대조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 요즘 들어 가족과 친지들을 통하여 질문받는 “장래계획”에 대한 물음은, 적잖이 곤혹스러웠지만 반드시 다시 천명을 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로 나온 이유는 영혼을 구하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수하게 순종하고자는 목적에서 였습니다. 이제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었으니 국내에 복귀해야 한다는 조언의 말들은 현실적이기는 하겠으나, 그 안의 숨은 뜻은 “선교지에서는 장래가 불투명하다. 구체적인 노후에 대한 계획을 위해 이제 이상은 접어라”인 것이죠. 이 말에 제가 동의하다면, 저는 이곳에 나온 이유가 “선교를 통해 현지에서 사역적 성과를 가시적으로 만들어 국내의 목회에 멋지게 복귀하기 위해 나온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입에 달고 살아온 Misio Dei(선교의 하나님)는 하나의 마케팅 전략으로 치부되게 되는 것이고요.
안 그래도 파푸아뉴기니의 한 지역교회의 담임이 된 제자에게서 ‘개혁주의교회 성경대학’을 담당하여 사역하던 젊은 사역자 가정이 10년을 채우고 이제는 호주로 영구 귀국하여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한 텀 5년 혹은 두 텀 10년의 계약을 채우면 선교지를 떠나 국내 사역으로 돌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양 개혁주의 교회의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이곳에 있는 한인 선교사들 가운데 아이들이 대입 특별전형 12년을 채우고 국내에 복귀하여 교단 내의 지역교회나 단체들로 선교사의 경력을 담임사역의 경력으로 바꾸어 들어가는 예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물음은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러 나갔느냐?”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야심을 교회안에서 교계에서 이뤄내고자 하여 교두부가 필요하니 선교지에 나온 것이냐?”
저희는 솔직히 저희 위에 있는 대상들을 돌아볼 시간이 여력이 없습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저희 자신들을 초라하게 볼 겨를이 없습니다. 도움을 받는 자로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경험이 주는 놀라운 유익은 저희보다 못한 이들의 심적인 황량함과 공허함과 슬픔과 아픔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는 엄청나게 값진 경험을 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저희 눈은 더 많은 경우 아래로 향하여 있으려 합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는 자신에게 인색하되 남에게 후한 조안이의 씀씀이를 칭찬합니다. 자신에게 혹독하되 남에게 인자한 조이의 성품을 칭찬합니다. 자신에게 엄격하되 남에게 관대한 조셉의 원칙을 칭찬합니다. 이곳에 오시면 아실 겁니다. 얼마나 저희 아이들이 현지의 사역자 가정을 사랑하고 겸손하게 섬기고 어린 아이들을 성심을 다해 챙기는 지를 직접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하나, 인도네시아 교회들을 통제하고자 하는 정부를 위해 기도 드립니다.
현 정부에서 이슬람 과격단체들의 테러 연류를 파악한 후, 국가대테러부서를 발족하여 모든 종교기관의 예배장소를 통제해야 한다고 제안한 상황입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이미 종교성 산하에 기독교국을 두고 있는 형태를 취한 이상, 국가가 갑이 교회가 을이 되는 상황인지라, 만일 이 안이 통과되어 실현된다면 교회의 앞날이 참으로 어둡기 그지 없습니다.
하여, 교회의 국가부터의 독립이 보장되는 형국이 지속되고 나아가 더 발전되어 지기를 손 모아 주십시오.
둘, 인도네시아의 교인들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한시대를 풍미하던 유행이 지나고 나면 다른 유행이 돌듯이, 기복신앙의 정점을 찍었던 000 교회의 흥망을 뒤이어, 하이퍼 그레이스 (조셉 프린스)의 광풍이 이곳에 불어와 정신이 없는 지경입니다. 원죄뿐 아니라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며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이미 사면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기억하라 가르치고, 주말 저녁 신나는 술파티에도 주일만 성수하면 만사 오케이라 생각하는 사용자 편의위주의 가르침이 너무도 이곳에 편만합니다.
하여, 이들의 신앙의 목적이 자신의 안전과 위안과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생의 목적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여 주십시오.
셋, 인도네시아의 교회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외부에서 소개되어 들어온 '내부자 운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소개되어온 복음전파의 접촉점으로 여겨지던 이슬람 경전 코란에 언급된 예수님의 이름-이사 (Isa)-이 이제는 이곳의 무슬림들에 의해 선이 그어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명절들도 국경일로 정하여 쉬게 해오던 인도네시아에서, 성금요일과 승천일에 붙이던 "이사 알마시 (예수 메시야)"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지 않고 선지자로만 보는 무슬림들이 듣기에 그리 반가운 명칭이 아니었기도 하여 내년 2024년 부터, 이사라는 단어대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국경일을 지내기로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이슬람 신앙의 지키기 위해 혼돈의 여지를 없애려는 무슬림의 보수적인 시도와 달리, 선교의 이름으로 주의 사랑의 이름으로 혼합주의적인 희석되고 변질된 진리를 분별없이 받아들이려하는 이곳 교회들이 이제라도 성경에 입각한 바른 진리와 바른 관점으로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기도하여 주십시오. 한국교회도 포함하여서요.
넷, 동역하는 기관들과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여 주십시오.
1. 크리스타 미트라 중고등학교의 500명 가족이 중부자바의 소금과 빛으로 든든히 서 갈 수 있도록
2. 압디엘 신학교가 외면적인 시설의 발전보다 내면적인 성숙의 열매에 더 많이 신경을 쓰게 되기를
3. 뼁꼴로조 교회 (요하네스 목사)의 성도들이 성경의 사람들로 변화되기를
4. 끌라까 교회 (요셉 목사)의 주위의 무슬림들이 교회에 나와 복음을 들을 수 있기를
5. 바얏 교회 (코르넬리우스 목사)의 많아진 지역내에서의 헌신적인 사역에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있기를
다섯, 저희가정을 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재정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았다고 공공연하고 고백하였고 고백하고 있는 중이나, 때때로 생기는 특수한 재정적 필요의 상황에서에서 곤궁함의 경험들은 저희 믿음 없음을 한순간에 드러내 버립니다. 하여, 깨어있기 위해 쉼없이 주의긍휼을 구하는 저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이렇게 부탁립니다.
매일의 묵상에서 말씀의 위로와 힘을,
매일의 기도에서 죄고백과 회개와 회복을,
매일의 가족모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정직한 교제를,
매일의 사역에서 힘주시는 주의 손길과 고치시는 주의 치료와 혼내시는 주의 매를,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기를 기도하여 주십시오.